"발정 난 개새끼마냥 미친 듯이 쫓아다니는 꼴 좀 봐라, 또라이지. 너도 저렇게 되고 싶어?"

충고. 남자는 바에 앉아서 한참을 중얼거린다. 샷글래스를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굴리며 힘없이 흘러내리는 알코올을 바라본다.

"그 정도면 키스 한번은 괜찮을 것 같은데."

싱거운 웃음을 띈 바텐더가 말한다.

한참 깊어지던 하소연과 비판이 섞인 이야기가 방해를 받자, 남자가 손을 멈추고는 눈앞의 바텐더를 흘겨본다.

단정하게 잘 빗은 네이비 머리카락은 뒤로 묶고 깔끔하게 다린 와이셔츠에 짙은 회색을 띠는 조끼. 허리 꿋꿋이 반듯하게 서 있는 남자가 미소를 그리며 와인잔을 닦고 있다. 왠지 모를 노란 눈동자가 눈에 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저 자식이 누군데."

"웬만한 정성엔 눈짓 한 번도 안 해줄 남자죠."

한적한 바에서 두 명 밖에 남지 않은 손님들이 하고 있는 이 대화는 바로 둘의 고등학교 재벌 동창, '도미노 시의 사장님' 하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그 대단한 능력자, 카이바 세토다.

"고상하게 그런 남자를 좋아해서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걸치고 스툴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남자가 다시 잔을 몇 번 굴리다 이내 안의 잔여물을 모두 들이마신다. 싸한 알코올의 내음이 코와 혀를 마비시키며 식도를 타고 천천히 내려간다. 시원하다.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일은 어지간히 쉬운 게 아니다. 더 독한 걸 시킬 걸 그랬나, 그냥 정신까지 마비시켜줬으면 좋겠군. 남자는 잔을 내려놓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비비다 제 - 하소연을 털어놓는 - 친구에게 눈길을 돌린다.

표정과는 다르게 어두운 안색의 조명이라도 되는 듯 밝은 주황빛을 띠는 눈동자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옆의 남자는 아직도 우울한지 그저 유리잔에만 시선을 붙일 뿐이다. 하지만 그도 금세 잔의 내용물을 비우고는 마른 세수를 한다. 두 손님의 빈 잔을 보며 더 마시겠냐는 영업원의 손짓에 금발의 남자는 괜찮다고 알리고는 진전없는 이야기를 잇는다.

"미치겠네 진짜. 이게 한 두 번도 아니고, 쟤는 어떻게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가 없군."

이제는 내가 돌 것 같다. 아무리 둔해도 저 정도까지는 많이 심하다. 요 두 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눈치가 없다고? 그는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스탠더드 높은 인간이다. 너의 그 알량한 표현방식은 어림도 없지. 친구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어주던 남자는 이것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금세 관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두 시간 동안 설득하던 -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 이야기를 다시 반복할 정도로 그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이 멍청한 금발은 죠노우치 카츠야. 눈치도 정도껏 없어야지, 이 녀석은 졸업하자마자 바로 연애사업에 뛰어든, 고등학교 때부터 짝사랑하던 남자 때문에 매번 주위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친구이다.

"아템,"

"....."

"나 진짜 어떡하냐."

우울한 저의 친구는 아까보다 훨씬 더 서글픈 기색을 뿜고 있다.

제 친구의 쓸데없는 사랑 이야기에 어떻게든 막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한 남자는 싫증 난 듯 손등에 천천히 이마를 비비고는 고개를 묻은 채로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03시 06분. 이 새끼가 대체 나를 얼마나 묶어 두었는가. 더는 안되겠다고 결심하고는 아템은 실증난 얼굴로 자리에 선다. 이건 도를 넘었다. 물론 오늘보다 더 심한 날도 많았지만, 오늘 아템은 계획에도 없던 중역 회의를 네 개나 마치고 야근까지 하여 돌아가던 길이었다. 회식까지 딸려있었다. 8년 전과 달리 아템은 더 이상 카드놀이같은 것에 목숨을 바치는 어린애가 아니다. 그는 이제 사회의 밝은 면과 더러운 면을 바라볼 줄도 아는, 어엿한 사회인이다. 그는 오늘 몸을 굴릴 대로 굴려, 숨 쉬는 시체로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더 이상 버티기엔 무리다. 이건 아무리 아템이 좋은 사람이어도, 힘들 것이다.

그래. 가자, 가. 아템은 마블 테이블에 몇 시간 동안 방치된 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자리를 뜨기 위해 벗어 두었던 코트를 집는다.

"...미안."

하지만 몇 초도 되지 않은 채 마음이 결심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씨발... 아템이 제 혀를 쓰게 씹는다. 그는 친구의 연애 사업을 마무리 지어줄 정도로 친절한 사람은 아니지만, 우울한 친구를 홀로 두기에도 나쁜 사람도 아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아템은 발길을 돌려 바 테이블에 코드를 걸치고는 다시 앉아있던 스툴에 걸터앉는다.

"마티니 두 잔. 제일 독한 걸로."

".....야.."

"오늘 마지막 잔은 내가 쏜다."

"..고맙다 새꺄."

아템은 술에 은근히 강한 편이다. 몇 년의 사회생활에 적응력을 가장 빨리 보였던 그는, 매번 빠질 수 없는 회식 덕분에 몇 잔을 마셔도 버틸 수 있었다. 한 잔씩 한 잔씩, 위장 속으로 쏟아부을 때마다 그의 음주량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내일- 아니, 오늘이 주말이라 다행이지. 그는 오늘 밤, 이 마지막 잔이 저의 독한 정신력을 뚫고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만을 빌어야 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두통이 심하고 속도 쓰리다.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다. 어제 너무 무리했나, 주말이란 사실에 아템이랑 늦게까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죠노우치 카츠야도 아템 못지않게 술에 센 편이다. 하지만 아마도 어제 아템과 헤어진 이후 편의점에 들려서 맥주 두 캔을 더 마신 것이 지금의 문제점일 것이다.

몸을 일으킨다. 다 구겨진 점퍼를 보아서는 어젯밤 이불도 깔지 않은 채 거실바닥에서 잠든 모양이다. 허리랑 어깨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까.

커튼 사이로 방을 채우는 노란 빛을 봐서는 오후임이 틀림없다. 무거운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한다. 시간을 보고 더는 꾸물거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말이란 생각에 다시 눕는다.
    내일은 꼭 일찍 일어나야지. 몇 번이고 무산되었던 다짐을 되뇌인다.

죠노우치 카츠야는 공인의 불량아였다. 뛰어다니는 일이나 손찌검을 하는 등, 몸을 굴리는 일이 아니라면 보잘 것도 없는 문제의 고등학생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고등학교 때에는 체육 외에는 잘한다고 볼만한 것이 없었다. 공부는 물론, 학교숙제 등 시험이란 시험은 아는 친구 어깨너머로 훔쳐봐 아슬아슬한 점수로 간신히 넘겨짚는 수준. 신의 미움을 샀나 보지, 주위에선 어른들의 동정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잘하고자, 열심히 하자는 욕심은 있었다. 절대로 실행으로 옮겨지는 일은 없었지만. 딱히 곱게 쓰일 몸이 아니었던 그는 뒷골목 패거리를 만들어, 도미노 시의 유명한 양아치 죠노우치 카츠야로써 생활하게 된다.

그의 생활은 보잘것없었다.

그리고 그 보잘것없던 생활에 크게 개입한 사람이 있었다. 카이바 세토. 도미노 시의 알아주는 재벌이자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사장 자리를 이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자. 죠노우치같은 부류의 사람은 감히 함부로 다가갈 수가 없는 상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몇 번의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적은 있어도, 절대로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는 사이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처음에는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둘의 극과 극인 성격도 한몫했지만, 서로 이어질 수 없는 이유는 아마 차원부터가 다른 둘의 사고방식의 탓이 아닐까. 둘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죠노우치는 그 묘한 이질감을 따랐다. 몇 년의 만남에 거쳐 죠노우치는 자신의 감정이 크게 바뀌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움은 기쁨으로, 어색했던 마음에는 친근함이 묻어났다. 이유는 몰랐다. 처음에는 동질감인줄 알았다. 자신과 같지만 엄연히 다른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느끼는 어설픈 동정이며 동질감. 비슷하지만 다른 두 감정을 느끼는 이상한 마음이었고,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백해.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뇌리를 스치듯 빠르게 떠오른 이 감정을 무시했고,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계속 부정했다. 동질감이 이끄는 묘한 마음은 따랐지만, 그보다 더 깊어질 감정 따윈 없다고 믿었다.

이렇게나 다른 사람을 내가 설마.

죠노우치는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는 그 감정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했다고, 그저 나무 위에서 겁을 먹고 있는 고양이를 향한 감정, 저보다 더 가엾은 동지를 향한 친애의 정이며, 진심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얼핏 보면 꽤 합리적인 그런 생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다가가려고 했다. 친구를 대하듯 평범하게 대하고, 필요 이상의 말도 해보고. 그 부정적인 생각이 자신과 더불어 혼자서 다른 인생을 걷는 그를 멈춰 세우려고 했다.

동정이지.

지금 보면 딱히 멈춰준 것은 아니었다. 카이바는 동정 - 으로 생각되는 - 이 묻어나는 제 방해물의 친절 있는 손을 밀어냈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갔다. 하지만 저를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과 마주쳤을 때, 죠노우치는 알 수 있었다.

두 번째에 진실을 알았다. 죠노우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절실한 사랑, 친근함도 동질감도 아닌 자신의 마음에서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감정. 그제 것 애써 무시해왔지만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절실했다. 그는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랑이란 감정을 품은 불량아 죠노우치 카츠야는 그 작고 부질없는 감정 하나를 위하여 자신의 볼품없는 생활을 조금씩 지워내기 시작했다. 그는 골목길 생활에서 탈퇴했다. 양아치 생활도 접고, 머리를 싸매고 처음으로 진심 있는 공부를 했다. 자기 진로를 완전히 틀어버린 것이다. 놀랍게도 그의 두뇌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모자라지 않았다. 한 개씩 책을 집을 때마다 그는 자기 바닥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환경이 바뀌고 저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신 떠받쳐주고 있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더니. 죠노우치는 도미노 고교를 졸업한 뒤 저소득층 학생으로 장학금을 받고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었다. 카이바 세토는 명문대에 입학했고, 이제 남은 일은 사회에서나마 그와 비슷한 위치에 속하는 것이었다. 눈을 찔끔 감았다. 죠노우치는 남은 사 년을 미치도록 공부에만 쏟아부어야 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되뇌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카이바 코퍼레이션에 취직돼 있었다. 그 작은 감정이 저의 인생을 이렇게나 바꿔놓을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조금이나마 그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눈을 떴다. 몇 시지, 휴대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한다. 15시 38분. 한 시간 정도 잤나. 지끈거리는 머리에 등을 밀어 올리고 엄지로 미간을 누른다. 몸이 영 좋은 상태는 아니다. 온몸이 쑤시는 건 달라지지 않았고, 두통은 더 심해져 있고, 이제는 기분까지 최악이다. 두통약이 필요하다.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커피 테이블 한쪽에 놓여있는 파나돌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아니다..."

    폰를 다시 짚고 일어나 점퍼를 벗어 던지곤 그대로 소파에 몸을 던진다. 관두자. 쿠션을 끌어다 얼굴을 묻으며 그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다행이라 여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는 차가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잠시 필요없는 고민을 하다, 이내 정교한 기기의 면을 들어 올리고 다이얼을 찾는다. 죠노우치는 끈질긴 이 감정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애절하지만 지긋지긋하다. 끊을 수 없는 감정에는 어떻게 막을 내려야 할까?


기계로부터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꺼져라.. 오늘도 잡아놓을 생각이면 죽는다."

    "야."

    "끊는..."

    "농담이지만 죽으면 어떤 기분일까?"

    전화기 너머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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